세 분의 스승님
부처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이 오온의 무상함을 말씀합니다.
내 몸이 거짓임을 환상임을 말씀합니다.
백봉 김기추 선생님의 설법도 많은 부분을 이 몸이 찰라찰라 변하는 헛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나의 관리물 일지언정 내 소유물은 아니다, 나의 소유물이라면 내가 늙지 말라고 하면 늙지 말아야 하는데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지 멋대로 변한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은 허공과 같으면서 슬기가 하나 더 있는 것이라 합니다.
즉 지혜의 성품이 있는 것이라 합니다. 절대성(성품) 상대성(무상한 삼라만상)의 설법에서 저는 이전까지 들었던
모든 법문이 한줄로 꿰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근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의심나는 부분은 다시 밀라레빠의 법문을 참고하면서 이전에 충분히
공부하고 검증하였지만 새삼스레 백봉 김기추 선생님의 설법이 정법이고 뛰어나다는 것을 또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불교계에 수많은 스승들이 계시지만 부처님-밀라레빠-백봉 김기추 선생님을 저의 법맥으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제가 법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가겠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은 그 시대의 정법을 말씀하셨고, 1500년이 지난뒤 밀라레빠께서 마음과 공성에 대한 상세한 설법을 하셨고,
또 다시 1000년이 지난뒤 백봉 김기추 선생님께서 허공성으로서 현재의 시대에 맞게 설법을 하셨습니다.
수많은 스승님들의 인연에 감사하면서 특별히 세분의 스승들에게 예를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 설법
비구 수행자들은 낮은 법 두 가지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깜마 오욕락의 기쁨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낮은 법이다.
극심한 고통으로 자기 스스로를 피곤하고 힘들도록 괴롭히는 것이 하나의 낮은 법이다.
나 여래는 낮은 법 두 가지를 떠난 중도 수행법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수행은 뜨거운 번뇌를 거두며,
특별한 지혜로 잘 알게 하며, 닙바나의 이익을 준다.
그 중도 수행은 어떤 것인가?
바르게 봄, 바르게 생각함, 바르게 말함, 바르게 행함, 바르게 생명을 이어감, 바르게 노력함, 바르게 기억함,
바르게 머무름이다. 이 여덟 가지를 구족하면 성인의 도를 이룰 수 있다.
바르게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닙바나를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지혜이다.
닙바나는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사실인가?
모든 고통이 다하여 없음이 바르고, 모든 고통이 다하여 없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고통이 모두 소멸해 없는 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통이 모두 없는 진리가 분명히 있지만
사실대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고통을 고통이라고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무아)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고통이다.
줄여서 말한다면 집착하는 몸(오온)이 모두 고통이다.
●고,집 성제
비구들이여! 여기에 말하는 법은 성인들이 아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진리이다.
목마르게 원하는 것은 새로운 생이 생기게 한다. 좋아하고 푹 빠져서 헤어날 줄 모르게 한다.
갖 가지 대상의 깜마 오욕락에 집착하게 한다. 이러한 갈애는 세 가지가 있다.
1)모양, 소리, 냄새, 맛, 닿음 등 바깥 대상에 탐닉하는 것
2)마음의 인식작용이 차례로 이어져서 영원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3)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집착하는 것
●멸성제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의 뿌리는 이 세 가지 갈애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말하는 법은 성인들이 아는 고통이 완전히 소멸한 진리이다.
그 고통의 원인이며 뿌리가 되는 갈애를 남김없이 뽑아버려서 다한 것,
모든 갈애에서 벗어나서 집착이 없는 것이 고통이 완전히 소멸한 진리이다.
●도성제
중도수행으로 그 번뇌가 소멸한 곳에 이르는 바르게 수행하는 진리(팔정도)이다.
닙바나를 현재에 행하는 진리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가르치기 위하여 6월 보름날부터 열 아흐렛날 까지 5일간 설법을 하셨다.
6월에는 모든 수행자에게 무아경을 말씀하셨다.
생기고 사라지는 모든 범위 안에 있는 것들 속에는 나라고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씀하셨다.
다섯 수행자들이 모두 이 무아경의 법을 듣고 수행의 완성인 아라한이 되었다.
☢밀라레빠 설법
일심(一心)은 바탕이 없고 텅 비어 있나니 티끌보다 더 적어라.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따로 없을 때 '바른 견해' 비로소 체득되도다.
삼라만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자는 그것이 다만 마음의 그림자임을 깨닫게 되네.
하여 공(空)과 형상(色)의 평등성을 아네.
법신의 본질은 형태 속에 현현되나니 무수한 형태는 곧 화신불이라
마음속에 이러한 지견으로 어떤 환경 만나든지 나는 대자유의 기쁨을 누리도다.
마음의 본성은 빛과 공(空)이네. 빛과 공(空)을 깨달아 무위의 본래적인 상태에 머무나니
좋은 경험, 나쁜 경험 상관없어라.모든 현현은 안개나 아지랑이 같음을 알아야 하리니,
일체 중생을 제도키로 서원했을지라도 모든 존재의 나툼은 호수에 비친 달 그림자일 뿐이라네.
인간의 육신은 마법의 환영이네. 매임 없이 바라보면 자유의 날개를 얻게 되나니,
하여 진흙탕에 핀 지순한 연꽃처럼 순결하게 살아가노라.
법신(法身)은 허공 같아 일체 중생에 두루 넘치도다.
허나 업의 진리에 무지한 그들은 윤회 세계 맴도네.
태초에 어떤 것이 온 바도 없고(不來), 중간에 어떤 것이 머문 바도 없으며(不住)
마지막에 어떤 것도 간 바가 없나니(不去), 참마음은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네.
과거. 현재. 미래에 한결같이 상주하네.
나타난 세상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니, 어떤 일이 생겼다고 보면 그것은 집착에 지나지 않네.
윤회의 현상 세계 실체 없나니 실재 있다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네.
마음의 본질은 '하나 속 둘'인 데 있으니,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는 마음 일으키면 그것은 애착과 탐착이라네.
삼라만상에 편재하는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불생(不生)의 세계와 분리된 적 없으며
삼계(三界)향한 윤회 길을 끊어버리네. 이를 일러 완전한 깨달음의 확신이라 하노라.
"세속 진리[俗諦]에는 윤회계와 열반계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고한 진리 세계[眞諦]에는 나타난 세계와 공(空),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한결같은 '일미(一味)'이네.
이것이니 저것이니 차별이 없어 만법(萬法)은 위대함 속에서 '하나 속 둘[不二]'이라네.
내가 아는 진리는, 삼라만상은 일심(一心)이며
그 마음은 어떤 그림자의 흔적도 없는 투명한 공성(空性)이라는 것이오.
☢백봉 김기추 선생님 설법
여러분들은 이 누리의 주인공. 색신으로서의 내가 아니고 허공으로서의 내라 말이여.
허공자체에 슬기가 있으면 바로 영지거든. 허공이라 해야 알아듣기가 쉬워.
그래서 허공이란 말을 빌어서 여러분에게 쓰는 거예요.
본심.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니 어떻게 되죠? 허공하고 이거하고 둘이요? 하납니다. 허공 어디 있어요?
허공 없습니다. 우리가 빌려온 말이에요. 불성. 우리의 불성 찾아낼 수 없어요. 이 것도 빌려온 말이에요.
생각하는 놈 있거든. 불성이니 뭣이니 말하는 놈 있거든. 그런데 찾지 못해. 허공하고 이 놈하고 꼭 하나라.
그런데 허공, 마음, 불성 이라는 말 전부 거부하고 싶어. 그런데 거부 한다 이 마음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네.
그러니 결국 허공하고 우리의 불성하고 결국 하나다. 이런 결론이 나는 거예요. 땅덩어리가 어디서 왔는지?
태양이 어디서 왔는지? 이것을 알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더라 이걸 훤히 압니다.
모습은 헛거다 거짓이라 말이지 진짜가 아니라 말이지.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아주 명심해야 할 것은 헛것인 모습이
아니면 각 개인의 인격을 나툴 수 없어. 그러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인격도 나툴 수 없다는 이런 결론이 딱 내려진단
말이에요. 일체 방하착 해 버려. 이것이 허공을 향해 한 발 내 딛는 그거라요. 방하착해 버리면 무엇이 있죠?
보고 듣고 말하는 그것 밖에 더 있어요? 그 자리가 부처 아니라요?
그러니까 나를 붙듦으로서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다는 거.
우리의 법신은 낮에 활동을 하거나, 밤에 잠을 자거나, 숨을 넘겨 죽을 때라도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을 떠난
소소영영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몸을 진짜로 알고 육근으로 인한 경계에 닿질려 경계와 타협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쓰긴 쓰더라도 경계에 집착함이 없이 써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돼요.
그러면 낮에 너무나 경계에 쏠려있기 때문에 잠을 자면 우리의 법신도 함께 자는 형상이 됩니다.
즉 눈이 자니까 법신도 따라서 기능을 상실 하는 것입니다. 잠잘 때 자기의 법신을 잊어버리면 헛공부 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공부가 됐노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라면은 꿈을 보는데 꿈 보는 줄 알면은 이건 틀림이 없어.
그러면 살아 있을때나 꿈꿀 때나 죽을 때나 생각이 꼭 같습니다. 꼭 같지 못하다면 이거는 팔만대장경을 줄줄 외우고
해도 소용이 없어. 그러면 어찌 해야 되겠느냐? 대치법이 있어요. 좋은 인을 자꾸 심어야 돼.
이 색신을 걷어잡고 항상 공리에 요달해야 합니다. 공리 빈 이치. 공리에 요달해야 돼요. 또 대치법이 있어.
빛깔, 소리, 냄새 등과 타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사를 뛰쳐 나는 공부를 하는 마당에
매일매일 훈련해야 돼.
나는 “허공성이다.” 이거 하나예요 이거 내 살림이에요. 어찌 허공성 아니냐 말이여. 이 허공중에 일체 만법이 이루어져.
별이니 달이니 자갈. 나무. 모래든 뭣이 있어봤든 지구자체 달. 태양이 허공성 아니여? 이거 면치 못해. 허공성이여.
좀 더 구체화시킨다면 평등성. 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절대성.이렇게 말할 수가 있거든.
그러나 절대성 자리도 허공성이라 말이여. 여러분 이거 단정해야 돼. 단정해서 그대로 나가야 돼.
그러면 오늘저녁 문제가 달라져. 올 때보다 나갈 때 문제가 달라져. 그럼 우리가 성품 중에 밉다 곱다 했다 말이여.
경계에 따라서 내 마음이 일어났다 말이지. 경계 그놈도 허공성이거든. 또 경계에 따라서 밉다 곱다 생각이 일어나는
이것도 허공성이네. 어느 것 허공성 아닌 것이 어디 있냐 말이지. 우리의 몸뚱이 세포가 어떻고 적혈구 백혈구가
어떻고 이 야단을 해봐도 이것도 허공성이라 말이여. 어느 것 허공성 아닌 것 없거든.
여기서 일어나서 성품 중에 있어서 밉다 곱다 어느 것 허공성 아닌 것이 없어. 전부 허공성 놀음이야.
이거 내살림이여. 망심이라든지 세간에 벌어지는 망심이라 하는 것도 허공성이여. 전부 참이다 말이여.
전부 진에서 나온다 말이여. 탐진치도 진에서 나온다 말이여. 전부 맞는 말이여. 지금 그 자체도 허공성 아니라?
어느 것 허공성 아닌 것이 어디 있어? 그 다음 모든 것 꿈이라 말이여. 이것도 허공성이거든. 허공성 이기 때문에
산에 터널을 만들어. 나무도 허공성이라 말이여. 부러져. 톱으로 캐면 깨져 칼로 끊으면 끊어진다 말이여.
어느것 허공성 아닌 것이 없어. 허공성이기 때문에 능히 착할 수가 있고 악할 수가 있어. 허공성이기 때문에 밝으면
밝은대로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그대로 살림살이가 이루어져. 조금도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충돌이 안돼.남녀간도
그만 허공성이여. 우리로서는 견성. 성품을 봤다.무엇을 본다는 거냐. 허공성 보는 거여. 허공성 보는 거여.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 우리가 허공성을 보아야만 그것이 온 누리의 진리라고 할 수가 있는데 진리자체가 바로 허공성인데
이걸 확실히 파악을 해야 그 때 가서 가짜 놀이가 돼.물론 우리가 가짜 놀이를 굴리더라도 이것도 허공성이라.
다시 사람몸을 받아. 이런몸도 받을수 있어. 저런 몸도 받을 수 있어.공부가 된 사람은 마음대로 받아.또 재미를 봐.
우리가 이 공부를 하려면 전부 허공성이라는 것이 바탕이 돼야 돼. 이제는 우리가 의심을 놓아야 돼.허공성 이것이
내주인공. 이것이 바로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