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월암스님 이야기. 박원자(승진행)님의 <인생을 낭비한 죄> 가운데서
(이글은 박원자(승진행)님의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책 내용 가운데 월암스님 편을 옮겨 왔읍니다. 혜국스님, 성철스님, 청화스님 등등 26분 스님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꼭 구입해서 읽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문경 한산사 월암스님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월암스님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다.
행자시절을 듣기 위한 인터뷰 초반, 스님의 살아오신 이야기 들으면서 짐작했다. ‘불교를 중흥합시다.’란 결의를 가슴에 품고 청소년기를 지나 한평생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라고, 누구보다 불교 중흥에 열정이 많아 대중을 향해 법문을 많이 하시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보다고 미루어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속삭여야 할 때도 소리 지르듯 큰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이야기하시곤 스님께서 그러셨다.
“이 이야기 글로 쓰면 안 돼요!”
“그래도 스승께 혼난 이야기는 써야죠.”
그러나 결국 스님의 행자시절 이야기를 쓰면서 스님의 목소리 큰 사연을 쓰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월암스님의 출가 동기는 이렇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를 무렵,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학교에서 늘 급장을 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는 아이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입시를 치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정방문을 한 것이다.
“아버님! 염려마세요. 아드님이 공부를 잘하니까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시키면 됩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자신도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던 아버지는 장학금을 타서 공부할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설득에 공장에 취직시키려던 생각을 바꾼다. 그 날, 들판을 바라보고 앉은 아버지와 선생님의 등판을 보면서 소년은 희망을 읽었다. 드디어 경주에서 수십 리 떨어진 벽지의 시골 소년은 경주로 대망의 유학을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문고 출납을 담당하면서 도서관에 꽂혀 있던 책을 거의 다 섭렵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왜 그렇게 부처님의 일대기나 원효대사 전기가 사무쳐 마음속으로 들어왔던지 읽고 또 읽었다고.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하시던 이야기나 원효대사, 사명대사의 고행기가 왜 그렇게 가슴을 후려쳤는지 모른단다. 그러면서 “나도 스님이 될 기회가 있으면 고행을 좀 해봐야겠다.”고 다짐하셨다. 그런데 그 고행을 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초, 불교학생회원을 모집한다고 경주고등학교 선배들이 온 것이다.
날짜도 잊을 수 없는 그 날, 음력 8월 5일, 양력 9월 5일. 소년은 학교 근처 분황사로 가서 훗날 은사가 된 지도법사스님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해버리고 만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방과 후면 도서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철학이며 문학 그리고 불교 책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고, 불교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정리되고 차원이 좀 높아져 있어 ‘정말 한번 출가해서 제대로 된 수행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즈음이었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절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날 은사의 게송은 출가에 대한 나의 마음을 격발시키기에 충분했죠. 그 게송이 얼마나 마음으로 사무쳐 들어왔는지 그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그때를 그대로 재현하듯 눈을 지긋하게 감고 게송을 읊으셨으니, 스님의 운명을 결정지은 게송은 이렇다.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도를 생각하리라.
나는 무엇을 말할까. 도를 말하리라.
나는 무엇을 행할까. 도를 행하리라.
하여 도를 생각하는 마음 잠깐인들 잊으리까.”
열다섯 살의 소년은 그 게송을 듣고 생각했다고 한다.
‘맞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다면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바로 이 길이다.’ 라고.
스님의 말씀으론, 사십여 년 전인 1970년 전후, 당시 경주 지방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불교중흥에 대한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법문을 끝내고 법사 스님이 ‘출가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항시 몇 명은 손을 번쩍 들었고, 손을 듦과 동시에 삭발을 시키고 출가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 앞에서 ‘출가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그 자리에서 머리칼이 저절로 떨어지고 수염이 떨어지며 가사가 저절로 입혀졌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경전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월암스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이해했다.
그런데 고행을 하고 싶어 하는 소년의 사무친 마음을 알았는지 스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 자리에서 스님이 되지 못하고 3년 동안의 매운 고행 끝에 계를 받고 정식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께서 목소리가 커진 이유는 그러니까, 3년 동안 치룬 행자시절의 고행기간에 일어났던 것이다.
절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천수경을 외우고 불공 염불을 익히면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던 스님은 학교 공부가 점점 시시해지더란다. 그래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반쯤은 학교엘 가고 반쯤은 절에서 일하고 공부하면서 보냈다.
행자시절, 은사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누군가 ‘너, 대통령 할래? 중 할래?’라고 물었을 때, 중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일이란 아지랑이 같고 꿈과 같고 번갯불과 같고 허황한 것입니다. 대통령, 설사 전륜성왕의 자리에 앉게 하고 이 우주법계를 통째로 준다고 해도 저는 중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자라야 중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그 말이 그렇게 사무쳤다.
“‘견성성불(見性成佛) 광도중생(廣度衆生)’이 늘 사무쳤고 ‘불교를 중흥해야 한다’는 신심과 원력이 가슴에 뭉클대고 있었죠. 찬란했던 신라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탑 터나 절터를 답사할 땐 얼마나 마음이 숙연해지곤 했는지 눈물을 흘리면서 ‘불교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원력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그때의 그 숙연한 원력과 뜨거운 신심이 지금까지 수없이 법문을 해오면서 나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스님의 목소리는 왜 그렇게 커졌을까? 스님은 비로소 은사스님께 야단을 맞고 무려 네 번 고막이 터졌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자연히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은사스님이 회초리를 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천 리, 만 리 달아났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분이 생불, 살아 계신 부처님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은사스님께 맞는 일이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저 초등학교 때 읽었던 ‘고행’ 이라는 덕목이 가슴에 각인되어 있던 탓이기도 했을 것예요.”
이 이야길 듣고 함께 간 일행 모두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스님을 위로해드린다고 한 말씀 드렸다.
“아, 스님! 본디 훌륭하게 될 인물들은 어렸을 때 고생을 잘 이겨내셨더라구요. 종정스님께서도 열네 살에 절에 들어오셔서 3년 동안 행자시절을 보냈는데, 들어보니 고생을 많이 하셨더라구요. 그때 함께 있던 도반들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속가로 돌아갔고 스님은 종정이 되셨으니 훌륭하게 될 인물에겐 고생이 주어지나 봐요.”
“하하. 나는 훌륭한 인물도 못 되었고. 그런데 말입니다. 성장과정에서 그래도 그런 일은 없는 게 좋아요.”
스님의 웃음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지면서 진정한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경주불교학생회 회장과 영남불교학생회 회장을 지내면서 ‘위대한 신라 불교를 중흥, 재현하리라’는 원력으로 꽉 차 있던 스님은 ‘그 시절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왜 출가를 했는지, 무엇 때문에 중노릇을 하는지에 대한 답이 뚜렷했으며 수행자에 대한 자기 정립이 누구보다 확고부동했다.’고 하셨다.
절에 있으면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교일선에서 활동하다가 군대에 다녀오고 삼십대 중반에 북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0여 년 동안 공부와 포교를 병행하면서 선학(禪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는 스님께 여쭈어보았다.
“그런데 기대를 걸었던 아드님이 중학교 때 출가를 해버렸으니 부모님이 상심하시지 않으셨나요?”
“말도 마세요.”
공부 잘하고 매사 똘똘하던 큰아들이 지방의 명문인 경주중학교엘 들어가자 스님의 아버지는 조금 짓던 논밭을 다 팔아 경주 시내로 이사를 왔다.
‘내 아들이 좋은 학교에 다니니 공부 잘해서 판검사가 되어 출세하리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도회지로 나온 아버지는, 아들이 절로 들어가자 망연자실하셨다고 한다. 그리곤 급기야 집을 나가셨다고. ‘저 집 공부 잘하는 아이가 출세해서 부모를 먹여 살릴 줄 알았더니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더라’ 란 소문에 비감했던 아버지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가출을 한 것이다.
“스님께서 큰 불효를 하셨습니다.”
“부모님 곁에서 잘해드리는 것은 작은 효요, 인천의 스승이 되어서 다겁생래의 모든 부모님을 해탈시키는 것은 큰 효라 했습니다. 출가사문이 되었으니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큰 효를 해야 하는데,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불효막심한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지금까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다.
군대에 다녀와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에서 재발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려고 잠시 집엘 들렀다. 홀로 동생들을 키우면서 고생을 하시던 어머닌 큰아들을 보자 무척 기뻐하셨단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절집에 들어갔다가 이젠 철들어 당신 곁에서 살려는가 하고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잘해주시더란다. 하룻밤만 자고 가려던 계획은 이제까지 보지 못한 화색 만연한 어머니의 얼굴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출가의 길을 선택했던 모진 아들은 정확히 한 주 후 걸망을 짊어진 채 집을 나서면서 한 마디만 했다.
‘어머니! 저, 갑니다.’
사립문에 기대어 무정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내뱉은 한 마디도,
“마, 가나?”
스님은 지금도, ‘그렇게 꼭 가야만 하는가’ 하시던 어머니의 그 한 마디와 다시 절로 떠나는 큰아들을 망연히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한 자식 출가에 구족이 승천한다’고 했으나 출가해서 자신의 몸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서글픈 심정이라고.
까까머리 열다섯 중학생이던 때 출가를 감행하신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은 요즘 주무시다 자주 일어나 앉는다고 고백하셨다.
“내가 생긴 모양은 이래도 민감한 사람입니다. 늘 일대사에 대한 중압감이 떠나질 않는데 오십이 훌적 넘어가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날이 많습니다. 이렇게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에 일어나 앉아 잠을 못 이루죠.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이라, 하늘의 명을 알 나이인데 그것은 고사하고 나의 명도 스스로 알지 못해 안심입명을 못하고 살아가니까, 갑갑하죠.”
문밖에 염라대왕 신발 끄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는 스님께선 혼잣말처럼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든 것 놓아버리고 한 5년, 무문관에 들어가 나오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 경계 없이 마지막 청춘을 불태우면서 정진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심정입니다.”
죽음으로 뚫어야 할 관문인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가야겠다는 말씀 끝에 여쭈었다.
“지난 동안거 해제 법문에서 법정스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대들이 서 있는 자리가 곧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니, 기도수행을 한다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스님!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이 실현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린 잠시라도 세간을 떠나 기도도 하고 수행도 하고 싶어 합니다. 스님께서도 그렇게 공부를 하시고도 무문관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우리들 딜레마 아닙니까?”
“만공스님께서 ‘도반, 도량, 도사(스승)를 구족해야 공부한다.’고 하셨죠.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스승입니다. 법의 안목을 제대로 가르쳐줄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스승은 회초리를 들고 업을 질타하고 전도된 길을 가고 있는 자에게 올바른 길을 일러주는 분입니다. 그런데 신도분들은 아무리 법을 깊게 말해줘도 그때뿐입니다. 인정으로 잘 해주어야 따라옵니다. 이러면 무슨 법이 살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스님의 큰 목소리가 더 커지셨던 것 같다.
“불교는 ‘꿈을 깨라!’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악몽도 길몽도 꿀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간밤의 꿈은 소몽(小夢)이고 인생은 대몽(大夢)이죠. 우린 지금 칠팔십 년에서 백 년 정도 큰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악몽이든 길몽이든 꿈인 것이니 ‘꿈 깨라!’ 하신 겁니다. 팔만대장경 법문이 그 하나죠. 그런데 한국 불교는 악몽을 꾸지 말고 길몽을 꾸라고 일러주고 있어요.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그걸 말해주고 있고 신도들도 그런 이야길 좋아하죠. 중생은 꿈에 젖어 있어서 꿈을 깨면 죽는 줄 알아요. 그리곤 늘 길몽 꾸는 방법을 묻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부끄럽게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 가서 신수 묻기를 좋아합니다. 말이 좋아 가피이고 영험이죠. 내가 관세음보살을 몇 번 부르고 삼천 배를 몇 번 했으니 우리 집에 편안함이 오겠지, 건강하겠지 하는 것은 결국 꿈속의 일로 길몽을 꾸는 것 가르치는 거예요. 설사 방편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핵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꿈 깨!’라고 하는 겁니다. 꿈 깨고 나면 산해진미를 먹은 자나 굶은 자나 똑같습니다. 꿈에선 부자를 매우 부러워하지만 꿈 깨고 나면 똑같습니다. 도를 깨쳐 바른 눈이 열리면 원수니, 친한 이니 하는 경계는 다 꿈속의 일입니다.”
스님의 법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기 원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가 아닙니다. 〈칠불통게〉에서도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情其意)’라고 했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그것에만 머물면 불교가 아닙니다. 자정기의, 스스로 그 마음(뜻)을 깨끗이 하라, 곧 자각기심(自覺其心), 그 마음을 깨달으라’를 행했을 때 앞의 것도 동시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 전체를 다 보듬어서 중도로 회통될 때, 그러니까 세 번째 것을 깨우쳤을 때 선악이 올바른 것입니다. 역대 조사들께서 이런 말을 다 하셨어요. 요즘 신행 차원을 보면, 신도들은 스승을 찾아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간절하지 않습니다. 이젠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에게 화엄의 경계, 본래면목의 도리를 물어야 합니다. 화엄경 무슨 품이 이해가 안 되니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열변을 토하시는 스님께 여쭈었다.
“그런데, 스님!! 꿈은 어떻게 깹니까?”
“괴로워서 죽거나 좋아서 죽거나 꿈속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가 깨워줘야 합니다. ‘뭐 하냐’고 흔들어 깨워야죠. 공부를 해서 공부로 죽어야 합니다. 사중득활이라고 하죠. 악몽을 꿀 땐 최고로 막다른 골목에 가면 깨잖아요. 까무라치게 기쁠 때도 깨어나죠. 그런데 밤에 잠들어 꾼 꿈은 자고 일어나면 절로 깨지는데 중생의 업으로 인한 꿈(업몽)은 갈수록 깊어집니다. 나를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교리 공부를 제대로 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어설퍼도 자꾸 해야 합니다. 대혜선사는 참선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익은 업식망념은 설게 하고, 선 진여본성 자리는 익게하라는 뜻이겠지요.
수행은 반복입니다. 중생은 업으로 태어나잖아요. 업생(業生)이죠. 그래서 중생은 업을 반복하고 보살은 원생(願生)이라, 원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업생을 떠나 원생은 없죠. 중생은 앞이 가려 있으니 업이 되어버리고 보살은 트여 있으니 업이 원이 되는 겁니다. 수행을 해서 벗어나야죠. 수행이 우리의 삶의 테마가 되지 않고는 업의 미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수행을 해야겠습니까?”
“경전 읽고 염불하고 주력하고 화두 들고 하는 일 모두가 수행 아닙니까? 경전 독송은 지혜의 눈을 틔웁니다. ‘간경자(看經者) 혜안통투(慧眼通透)’라고 했어요. 경전을 마음으로 보다 보면 심안이 열립니다. 지혜가 열리죠.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 주력을 하든지 일심으로 하면 업장소멸이 되는 겁니다. 용성스님은 ‘옴마니반메움’ 주력을 선 채로 9개월 동안 하고 선방에 들어갔는데 한 주 만에 열려버리셨다고 합니다. 역대 고승들이 주력을 많이 했어요. 통찰하고 직관하는 것이 업장소멸이고 끊는 것입니다. 업은 분명 장(障)이 되면서 힘을 발휘하죠. 업력이라고 하잖아요. 금생에 익혀 습관이 된 담배도 그만큼 무서운 힘이 생겨 끊기 어려운데, 수억 겁 동안 자유분방하게 중생의 업을 반복해왔으니 수행한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 방울 빗방울이 수천 년 동안 떨어져서 바위를 뚫잖아요.
수행은 반복이니까 무간단(無間斷), 틈이 없이 해야 해요. 물 샐 틈 없이 일념으로 해야죠. 처음엔 잘 안 됩니다. 하다 보면 어느덧 도망가 버리고 없어지기 일쑤예요. 엄격히 말하면 화두도 망념입니다. 그러나 화두라는 일념이 천념(千念)의 망념을 누르는 거지요. 처음엔 잘 안 되지만 반복이 되면 저절로 됩니다.
《선요(禪要)》라는 책에 고봉스님이 ‘화두 드는 것은 쇠로 된 밑 빠진 배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했죠. 끊임없이 젓지 않으면 물살을 거슬러 가지 못하고 뒤로 밀리는 것처럼 망념이 일어나면 이룰 수 없는 게 이 공부입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화두 드는 사람은 화두로,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로 반조하는 것이죠. 탐진치가 올라오면 화두로, 염불로 돌이키는 것, 이게 마음공부요, 수행인의 자세입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저선(無底船)의 의미를 새겼다. ‘그렇구나 수행한다는 것은 밑이 없는 배를 탄 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과 같구나. 쉼 없이 젓지 않으면 죽음인데 이렇듯 게으르구나.’ 하고.
스님은 요즘, ‘제왕의 자리를 준다 해도 중이 되겠다.’고 답했던 저 어린 행자시절의 다짐이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건재한지 자주 돌아본다고 하셨다. 중노릇을 할수록 더 신심 있어야 하고 더 간절해야 하는데 그러고 있는지, 수행자란 열심히 수행하고 교화하는 일밖에 다른 것이 없는 법인데 날이 갈수록 신심은 엷어지고 어긋나는 길로 가고 있는 거나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고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몇 년 전 울산의 한 신도 집에 갔다가 건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오는데 누가 부르더란다.
“아저씨!”
‘설마 나에게?’ 하고 돌아보니 한 아주머니가 도끼눈을 뜨고 스님을 째려보면서, “아저씨! 차를 왜 여기에다 세워놔요?” 하고 따지듯 묻더란다.
생전 처음 듣는 아저씨란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스님은 물었다.
“아주머니 방금 저를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아저씨요!”
“내가 아저씨로 보입니까?”
“그럼,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하지 뭐라고 그래요?”
스님은 그날 저녁 잠을 못 이루었다고 했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반성하느라고.
“절 집에 들어와 30여 년 동안 합장의 숲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살아왔더라고요. 돌아보니 한 번도 합장의 울타리를 넘어간 적이 없었어요. 기독교인과 부딪쳐본 적도, 이슬람인과도 만난 적도 없었어요. 불자 아닌 사람들을 만나 포교를 하거나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했던 적이 없더군요. 다시 말하면 소록도에 한 번 가본 일 없었던 거죠. 수행자라는 명목 하에 이 회색 옷을 입은 채 대접만 받아왔어요. 신도들이 가져오는 것을 받기만 했지 한 번도 몸 바쳐 희생과 봉사로서 이웃을 도운 적이 없었어요. 말로도 보시해준 적이 없었어요.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빵떡 하나 준 적 없고 아픈 사람에게 약 한 번 사준 적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열여덟 살에 처음 법상에 앉아 법문을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2천여 회의 법문을 토해내면서 불교중흥에의 원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신 스님은 자신을 아저씨로 부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전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하셨는데, 스님의 그 고민은 불자인 우리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음을 음미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