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5~6장
제
5장.
바른
도리를 진실되게 보다(如理實見分)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모양[身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못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몸의 모양[身相]은 곧
몸의 모양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모습[相]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을 모습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해설
석가모니 부처님도 노년에는 무상한 몸으로 인하여 육체적인 고통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상한 현상계(모습, 상대성, 물질, 정신)로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만약 모든 모습을 보되 그 모습이 무상하여 진실이 아닌 것을 항상 안다면 그렇게 아는 그 마음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입니다.
모든 모습이 무상하므로 수행하여 얻을 것(마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정각을 성취합니다.
눈 앞 허공과 같아서 내 마음은 유무를 떠난 것이고 얻고 잃음을
떠난 것입니다.
무상법신을 알면 무상한 그것이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이 부처행 입니다.
제
6장. 바른 믿음은 흔하지 않다(正信希有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과연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서 진실한 믿음을 낼까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길,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말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고,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한 순간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리라.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법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며,
법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응당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가 항상 말하길, “너희들 비구는 내 설법을 뗏목으로 비유함과 같이 알라” 하노니 법도
오히려 응당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해설
“모습으로서는
부처의 참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모든 모습을 보되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 부처의 참다운
모습(무상정등정각)을 본다”는 이 말씀을 오늘날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오온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가는 시대에 믿는 중생이 있다면 그 중생은 참으로 한량없는 선근을 심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모습에 쏠리지 않는 사람은 사상을 벗어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나는
위대하기에 너는 중생이라는 생각, 나는 영원한 해탈을 얻었기에 너는
유한한 생명체라는 이런
상대적인 생각을 벗어난 사람이기에
그
자체로서 무한한 복덕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비유로서 온갖 법을 말씀하시는데 중생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그것은 반드시 옳고 실재한다고
믿는 법상과 또한 부처님이 법상을 벗어나게 하려고 비법상을 말하면 또한 비법상에 집착하는 중생들이
있으니 참으로 부처님의 법은 생사의 강을 건너기 위한 방편의
뗏목인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극락과 지옥이 없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극락과 지옥을 이야기 하면
극락과 지옥이 실재한다고 믿는 법상과, 또 다른 중생을 위하여 극락과 지옥이 없다고 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비법상의 중생들이 있습니다. 극락과 지옥은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바다를 이
해한 사람에게는 없지만(법상 타파) 또한 파도가 엄연히 있듯이(비법상 타파)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방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