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지은 업에 의하여 여섯 세계를 끝없이 윤회를 합니다.
높은 세계인 천상에 태어남도 모습을 갖추면 무상하므로 언젠가는 끝남이 있습니다.
욕심과 형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하여 순수한 정신적 세계인 무색계 또한 나라는 아상을 버리지 못한 세계이므로
윤회의 세계입니다. 그러하기에 아상을 완전히 벗어나야 존재의 갈애를 벗어난 열반에 듭니다.
요즈음 남의 전생을 리딩해 주는 유명한 분(박진여)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의 리딩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리딩을 해주어도 당사자가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의 괴로움과 여러 인과관계를 따져 보면 동의할 수는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세가지 신통 중에 숙명통은 과거 모습을 갖춘 이래로 모든 삶에 있어서 부모님과 먹었던 음식과
기타의 정보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의하면 아라한의 숙명통은 8만 대겁 정도만 전생을 기억하는 것으로 부처님과는 차별이 있습니다.
성철스님도 윤회에 대하여 현대과학이 입증하는 여러 사례들을 입수하여 객관적인 입증에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가 한가지 불교의 윤회와 박진여 같은 분이 말하는 윤회의 차이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의 윤회는 철저하게 수동태입니다.
무거운 업의 순서대로, 강렬한 생각의 업의 순서대로 윤회의 삶을 받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진여 같은 분은 윤회 당사자가 영적 발전을 위하여 다음 생을 설계하여 행복한 삶이던 불행한 삶이던
윤회를 한다고 하는 능동태 입니다. 예로서, 어떤 분이 금생에 악행을 많이 하여 나쁜 업을 많이 지었는데 죽어서
이것을 속죄하고 영적인 발전을 위하여 금번 생을 설계하여 나쁜 환경에 태어나거나 피해자 주변에 태어나 속죄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이죠. 이것은 불교의 업에 의한 윤회와는 다른 것입니다.
불교도 가해를 했으면 다음생에는 피해자에게 그만큼의 피해를 당하거나 보상을 해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자기가 설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지른 업에 의하여 선택권 없이 그렇게 윤회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정신계에서도 능동태의 윤회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고 간혹 국내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스님들도 계신데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가끔 내 전생이 궁금합니다.
백봉 김기추 선생님은 과거 아홉생의 전생을 말씀 하셨다는데 저는 깜깜합니다. 달라이라마를 모시는 청전스님은
구산스님이 너는 과거 천축의 고행승 이었다는 말씀을 듣고 출가하셨듯이 자신의 도가 높아 남의 전생까지 훤히 보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혜국스님의 스승이신 일타스님도 남의 전생을 훤히 보셨던 도인입니다.
결론적으로 윤회는 괴로움입니다, 생은 괴로움입니다.
태어나지 마라 죽기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기 괴롭다. 원효와 사복의 대화 내용이지요.
그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부처님이 출가하셨고 마침내 윤회를 벗어난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비구는 윤회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을 이전에 읽었습니다.
참으로 한 생각에도 다음 생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윤회의 길을 끊고 싶습니다.
몇 년전 꿈에서 저와 모친이,말을 듣지 않는다고 집안 노비들의 숟가락을 작두로 잘라버리는 꿈을 꾸었는데
꿈의 생생함과 저지른 악행의 생생함에 바들바들 떨면서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금생에 모친과 내가 받는 금전적 어려움과 기타의 어려움이 식사가 전부인 그 시대에 그들의 숟가락을
잘라버린 과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무의식의 장난인지는 모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면, 불교에서는 999가지 좋은일 하고 1가지 악행을 했다면 999가지 선업을 받고 1가지 악업은
반드시 받습니다. 상쇄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금생에도 제가 기억하는 악업이 많으니 참말로 금생에 윤회를 끊지
못하면 다음 생에는 또 그업을 받아야 하니 무섭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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