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근본불교) 및 공성(선불교)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이들을 위하여 간단히 정의를 합니다.
사람들은 왜 윤회를 하는가?
이 세상 모든 것(상대성)은 반드시 변하는 무상한 것임에도 그 상대성에 대한 갈애와, 욕심으로 인한
의도된 행위에 의하여 다음 생을 또 다시 만들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일으킨 선업과 악업은 반드시 내생에 선과와 악과를 만들어 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사성제(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서 괴로움은 집착에서 생기고
그 집착을 팔정도(계정혜) 수행을 통하여 없애면(끊으면) 열반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열반(절대성)이란 갈애의 완전한 소멸을 뜻합니다.
절대성은 그 자체로 더 이상 무엇이라 할 수 없기에 절대성인 것입니다.
갈애가 소멸되면 다음 생을 만드는 동력이 끊어지므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개별적이고 영원한 자아, 영혼, 의식은 없다고 합니다.
단지 내 몸을 구성하는 오온이 순간순간 외부 경계와 부딪히면서 만들어 내는 것에 의하여 윤회를 할 뿐이라고 합니다.
즉, 나는 오온의 집합체일 뿐이고 오온은 허망한 것이라 절대로 나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으면 생시에 만든 업에 의하여 새로운 오온으로 구성된 내가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팔정도 수행을 통하여 모든 갈애가 소멸되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열반은 인간의 모든 언어와 논리,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 더 이상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발견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오온(작게는 자신의 몸과 크게는 이 세상을 이루는 나와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작용들)의 무상함을 깨달아
철저히 오온에 대한 갈애(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욕망)를 소멸하는 수행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의 결과인 열반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도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수행에 비중이 크고 수행으로 갈애가 소멸되면 도달하는 열반은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열반은 도달한다는 개념도 아닙니다만...)
부처님 입멸 후, 후대에서는 그 열반에 대하여 가능하면 유사하게 묘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불성, 진아, 공성, 자아, 여래장 등으로 표현을 합니다.
수행자들에게 먼저 목적지인 열반에 대하여 묘사를 하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수행을 중시했던 근본불교와는 다르게 목적지 제시를 먼저 하고 그 목적지를 중시한 듯한 느낌입니다.
부처님은 육체의 죽음 이후 자아니 영혼에 대하여 부정했지만 깨달은 사람은 열반에 도달하므로 죽음 이후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열반이 우리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에 그기에 도달한 부처님을 사후에 있다 없다고 논쟁하지 못할
뿐입니다.
공성도 그러합니다.
소위 선불교를 통하여 궁극의 자아를 본 사람에게 진정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최고의 대답은 양구 즉 입을 닫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함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의 자아가 바로 열반의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옛 선사들의 일화를 보면 설법을 하러 자리에 앉으시고는 묵묵히 계시다가 내려오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언어를 초월한 자리이기에 최선을 다하여 설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를 공부하시든, 그 근본불교를 시대상황에 맞게끔 공부방법으로 변화시킨 선불교를
공부하든, 아니면 일심으로 염불하여 문득 견성을 하시든 모두 진실임을 알아서 자신이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줄이면 마음 “心” 하나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것은 계정혜(팔정도) 입니다. 다른 말로 지관혜 입니다.
계를 지키면 마음이 안정되어 정이 이루어지며 정이 이루어지면 지혜가 생깁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나는 마음이 안정되어있다고 이야기 할 사람은 없겠지요.
술에 취한 뒤에도 마음이 안정되어있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마땅히 계정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허공성이란 허공과 같은 성질이라 허공이 모습이 없어서 우리의 인지 대상을 떠나 논쟁을 할 수 없듯이 허공성도 똑 같습니다.
나의 본래면목이 허공성이라 그 자리는 말로서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느낄 뿐입니다.
허공(절대성)은 사물(상대성)이 존재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이 동시에 없어진다면 어제까지도 사물사이에 있던 허공은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논쟁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논리와 사고를 넘어서는 일이 됩니다. 상대성에 대한 갈애가 사라진 열반(절대성)이 그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기의 선시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합니다.
“鷲峯良久三世空 毘耶黙然獨脚翁 취봉양구삼세공 비야묵연독각옹
岩下妄言義路切 小林觀壁案火宮 암하망언의로절 소림관벽안화궁
부처님 말씀이 없어 삼세가 비고 /유마거사 또한 말씀이 없는 한쪽다리 늙은이
수보리존자도 말을 잃어 뜻 길이 끊어졌는데 / 달마가 면벽한 동굴을 불 질러 버려라.“
하기 글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월폴라 라훌라 원저/퇴현 전재성 역저/2009년 9월 25일 개정판
에서 일부만 인용한 내용 입니다. 참고하십시요.
붓다 가르침의 핵심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 입니다.
1.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고성제)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든 괴롭다.”라는 의미의 괴로움 입니다.
-고통의 괴로움: 일반적인 고통에서 오는 괴로움(8고)
-변화의 괴로움: 영원히 지속하지 않고 변화하는 것에 의한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조건적으로 형성된 것에 의한 괴로움
(존재, 개체, 자아라는 것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 “수행승이여 괴로움이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2.오온의 분석
1)색온: 물질의 다발. 전통적인 지수화풍 사대와 파생적인 물질(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대상인 내적, 외적 모든 물질)
2)수온: 감수의 다발. 접촉에 의한 정신적, 물질적 모든 느낌의 집합.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적 접촉)
3)상온: 지각의 다발. 책상을 책상이라고 파악하는 개념적인 지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법)에 대한 지각)
4)행온: 형성의 다발. 감수와 지각은 의도적 형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업보를 낳지 않는다.
믿음, 숙고, 의욕, 해석, 집중, 지혜, 정진, 탐욕, 성냄, 무명, 교만, 실체에 대한 집착 등의 견해는 업보를 낳는
의도적 형성들이다.
붓다: 수행승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이다.)
5)식온: 의식의 다발.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이나 현상의 반응이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아차림이다.
예를 들어 눈이 파란색의 물체를 보았을 때에 안식은 빛깔의 존재를 알아챌 뿐이고 그것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3.물질과 의식
불교철학에 의하면 물질의 반대개념으로서 자아, 영혼, 자기라고 생각될 수 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의식은 없다.
의식이 삶의 지속적인 본질로서 계속되는 자아나 영혼의 일종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곧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면 그것을 시각의식이라 한다.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촉각의식,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하는 정신의식이 있다.
붓다는 의식이란 물질, 감수, 지각, 형성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것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존재니 개체니 자아니 하는 것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의 조합에 주어진 편리한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무상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 괴롭다.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의 의미는
괴로움은 다섯 가지 집착하는 존재의 다발이라고 정의 할수 있다.
4.붓다고싸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고 행위는 있지만 행위 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열반은 있어도 열반하는 자는 없고 길은 있어도 길을 가는 자는 없다.
5.무엇을 조건으로 괴로움이 생겨나는가?
붓다: 수행승들이여,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가 있다.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여기서 갈애와 탐욕은 관념과 이상, 관점과 견해, 이론과 개면 신앙 등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 곧 법에 대한 애착을 포함한다.
6.업은 의도적인 행동을 뜻한다. 아라한은 비록 그가 행동하더라도 업을 쌓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거짓된 관념, 윤회를 지속시키는 탐욕, 모든 번뇌와 유루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의지, 의도, 욕망, 살고 지속하고 더욱 많아지려는 갈애는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고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전 세계를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고 가장 큰 에너지이다. 불교에 의하면 이 힘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며 재생이라고 부르는 윤회를 낳는다.
7.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완전한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은 참으로 보기 어렵다.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무위라고 한다.
라다여, 갈애가 부수어진 것이 열반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만약에 그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성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에서 벗어남은 있을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태어나고 생성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에서의
벗어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공간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도 없고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바로 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나는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부른다.
열반이 탐욕을 끊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열반은 어떠한 것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이 결과라면 원인에 의하여 산출되는 결과일 것이다. 그 결과로 조건지어진 것, 곧 유위이다. 열반은 원안과 결과가 아니다.
열반은 원인과 결과를 넘어서 있다. 진리가 바로 열반이다. 진리는 선정이나 삼매와 같은 신비적 정신적 또는 영적인 상태를
낳지 않는다. 빠리니붓따(반열반)은 붓다나 아라한의 죽음을 의미할 때 사용하지만 열반에 들어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완전히 소멸함, 충분히 꺼짐, 아주 없어짐을 뜻한다. 왜냐하면 붓다나 아라한은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은 후에 붓다나 아라한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대답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의 언어로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인 열반은 바로 이 생에서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8.자아가 없다면 누가 깨닫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지혜나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배후에 다른 자아는 없다.
싸리붓다: 벗이여, 열반은 즐거움이다.
우다이: 그러나 싸리붓다여, 감수가 없다면 즐거움이 있을 수 있는가?
싸리붓다: 감수 그 자체가 없는 것이 즐거움이다.
열반은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유치원 아이가 상대성의 이론에 대하여 논쟁을 하면 안 된다.
다만 끈기 있고 근면하게 정진한다면 그것을 깨닫는다. 열반은 슬기로운 자에 의해서 각자 깨달아 지는 것이다.
-이상-
마하반야바라밀(허공과 같은 나의 마음을 바탕으로, 모든 상대성은 공성임을 알아서, 경계에 쏠리지 않으면서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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