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

닙바나 성품과 공성(초기불교에서 선불교의 뿌리를 보다)

하나의 길 2017. 8. 31. 16:52

제가 가끔 들러서 보는 카페에서 가장 빠르게 아라한이 된 바히야이야기를 올린 것을 읽었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께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아라한을 이룰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법문을 들은 횟수와는 관계가 없느니라.

아주 짧은 단 한차례의 법문일지라도 그것이 유익했다면 그것이 중요하느니라.

그리고 다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닙바나를 깨닫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편의 의미 없는 게송을 듣기보다는,

단 한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고요히 해주는 게송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

 

여기서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닙바나에 대한 정의와, 선불교의 깨달음과 관련된 원형(原型)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닙바나(열반)란 다음과 같습니다.

닙바나는 조용히 머무는 모습이다.

   그렇게 조용하기 때문에 생기고 사라지는 것과 섞이지 않는다.

그 성품 그 모습 그대로 조용할 뿐이다.  

   사실 닙바나의 법에는 고통이 먼지만큼도 없다. 고통의 그림자도 없다.

지혜 앞에 분명하게 있는 이 닙바나의 법은,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 없이 모든 번뇌의 뜨거움들이

  조용해진 언제나 머물러 있는 이 닙바나를 지혜가 없이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뜨거워질 걱정 또한 없다.

   원래 고요한 마음의 성품을 지금 현생에서 얻어서 체험할 수 있다.

행하는 이도 없고 시키는 이도 없이 그 스스로의 성품에 알맞게 생겨나는 성품

고통이 소멸한 진리에 해당하는 닙바나에 느낄 것, 취할 것, 얻을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그 어떠한 것도

   없는 성품 빠리닙바나라는 것은 기름접시 불 하나가 스러지듯이 조용해 진 것이다심지도 기름도 다

  소진해서 그 불꽃이 동서남북 어느 곳으로 갔거나 옮긴 것이 아니라 그 자리 그곳에서 태울 것이 없이

  소멸 한 것이다

고요한 성품, 조용한 소멸의 성품, 모든 탐심과 일체의 번뇌를 모두 소멸한 닙바나의 높은 법

이 납바나의 법을 체험하기 위해서 이 닙바나에 자주 자주 들어가 쉬는 , 이 일 외에 달리 해야 할 일은 없다.

한 번 체험 했던 그 행복의 맛에 마음을 기울이면 다시 체험 할 수 있다.

나라는 교만심을 빼어버리면 현재에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는 곳에서는

   거기에는 별도 빛나지 않고 태양도 전혀 빛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라문인 성자가 자기 자신의 지혜를 통해 이것을 알면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모두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닙바나를 본 이 보다도 아라한이 된 이를 더욱 존경하는 것이 적당하다.

비구는 윤회의 바퀴를 돌리는 어떠한 마음도 기울이지 않는다.

 

요약하면, 조용하고, 생사를 떠났고, 고통이 없으며, 현생에서 체험할 수 있고, 스스로 생겨나고,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며, 탐심과 번뇌가 모두 소멸된 법,

특히, 번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선불교에서의 공성(空性)의 체험, 견성 이후의 수행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닙바나는 조용하고 고통이 없고 번뇌가 사라진 체험할 수 있는 법이지만, 체험 했다고 하여 체험한 존재의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도 공성의 개념이 닙바나의 개념과 동일합니다.

선에서는 공성의 자리를 성성적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맑고 밝고 깨어있으면서 조용한 자리. 한 물건도

없는 자리, 무어라 말할 수 없어 오직 모를 뿐인 자리, 시공간을 벗어났기에 생사를 뛰어넘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공성을 체험(일상삼매)했다고 하여 바로 아라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공성의 자리에 머물기 위한 일행삼매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탐진치를 벗어나면 비로소 돈오돈수라 하고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다.

조사선에서 조사들의 한마디에 바로 활연대오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성의 자리를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는 미혹의 경지를 뜻하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견성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중의 하나의 도를 얻은 것이라

평가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화두를 10여년 참구하면서 마음속 탐진치가 모두 없어진 상태에서 홀연히 견성을

하면 즉시 돈오돈수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바히야는 부처님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부처님에 대한 강렬한 신심으로 밤새워 달려서 부처님이 계신 처소로

왔으나 탁발을 가신 부처님을 기다리지 못하여 탁발 중인 부처님을 만나서 세 번이나 법을 설할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거절에도 오로지 법을 향한 너무나 강렬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법을 묻고 답하신

한마디에 아라한의 경지까지 간 것입니다.

마하라쉬가 언급하신 완전한 순복은 해탈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깥대상을 볼 때 그 대상에 쏠리지 말고, 보는 그 마음을 항상 지켜보면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러면서 지켜보는 그 마음의 성질이 바로 닙바나(공성) 임을 알면 비로소 이 세상이 고, 무상,

무아 임을 알아서 진정으로 이 세상, 저 세상(사후 세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체득한 그 닙바나의 성품에 지속적으로 머물려고 노력하면서 탐진치 갈애가 끊어지면 아라한이

되어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백봉 김기추 선생님의 법문 중 대표적인 것이 경계에 쏠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입니다. 이것은 금강경에서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와 같은 말씀입니다.

 

저는 부처님의 근본불교와 그곳에서 파생된 여러 지관의 수행방법이 모두 동일한 수행방법임을 확신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그길로 오롯이 가면서 그 목적은 탐진치 갈애를 끊어서 윤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근본불교 외에는 모두 가짜라고 하는, 대승경전을 바탕으로 한마디 하려하면 그것은 비불설(非佛說) 이므로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는 일부 어리석은 이들이 이글을 읽어서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하기 바히야의 경우와 부처님을 40년간 시봉했지만 부처님 생전에 아라한이 되지 못한 아난다 존자가

결국 한 순간 아라한이 되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칩니다.

 

바히야, 그러면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하라.

보이면 오직 봄, 들으면 오직 들음, 냄새 맡으면 오직 냄새 맡음, 먹으면 오직 먹음, 닿으면 오직 닿음,

알면 오직 앎, 바히야 이렇게 수행하라.”

-보이면 오직 봄이란, 보는 마음이 원래 깨끗한 성품이다.

보이는 대상에 탐심으로 집착하지 말고 화냄으로 허물 짓지도 말고 어리석음으로 허둥거리지도 말라.

이렇게 보는 마음에 번뇌가 없다. 위빠사나의 마음만이 생겨나게 하라는 뜻이다.  

보는 마음 한 가지가 생겨날 때 가는 곳 마다 궁리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오직 보이는 대상, 오직 볼 수 있는

마음으로  관찰할 때 행하는 이도 없고 시키는 이도 없이 그 스스로의 성품에 알맞게 생겨나는 성품

이로구나하고   이해하게 된다이것을 냐띠빠란냐라고 한다.

이 가르침을 들은 후 바히야는 암소의 뿔에 받쳐서 죽었다

 

 

아난다 존자 이야기

달이 서쪽으로 갔는지 달빛에 나무 그림자가 장소를 바꾸었는지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몸의 움직임에 정확하게 알아차림을 붙여서 관찰할 뿐이다. 밤새 걸었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라하따 팔라는 그만두고 사가다가미 팔라에 조차 오르지 못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나?

나는 물러서지 않는 노력으로 수행하였다. 잊어버림 없고 알아차림도 분명했다. 몸에 고통도 없고

평안하였다. 마음은 한 대상에 잘 머물러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산람함이 생긴 것이다

나의 노력이 지극하구나!

나의 마음이 고요하게 머문다고 하는 생각조차 산란한 방심이 되고 있다.

산란함과 함께 자기의 위빠사나를 자기 스스로 아끼고 집착하는 성품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마음도 놓아버리고 몸도 놓아 버리고 누우려고 두 다리를 땅에서 들었다. 머리가 베개에 닿기 전,

발이 침대에 닿기 전, 막 누우려고 하기 직전에 내 일생에서 가장 특별한 일이 생겨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를 행주좌와 어디에 넣어야 하는가?

걷는 것도,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누운 상태도 아니었으니 그 네가지 상태를 벗어난 짧은 순간에

나의 모든 탐심과 일체의 번뇌를 모두 소멸한 닙바나의 높은 법을 분명한 지혜로 깨달아 얻은 것이다.

 

 

참고: 소따빠띠 팔라(수다원 과, 정견을 가짐),  사가다가미 팔라(사다함 과), 

        아나가미 팔라(아나함 과),  아라하따 팔라(아란한 과)

 

 

근본불교와 선불교를 회통한 이 지혜가, 다른 이들에게도 가득하기를 !

마하반야바라밀 !